언제부터인가 제 하루는 체크박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. 회사에서의 역할, 집에서의 역할, 누군가의 무엇으로서의 역할. 하나를 지우면 하나가 생기고, 그걸 지우면 또 두 개가 생깁니다. 체크박스를 지우는 속도가 생기는 속도를 이긴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. 그래도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.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려 애썼고, 힘에 부칠 때도 스스로에게 “이 정도는 해야지“라고 말하곤 했어요.
그러다 어느 날, 딱히 계기랄 것도 없이 현타가 왔습니다. ‘어? 나 지금 뭐 하고 있지?’ 싶더라고요. 그때 알았습니다. 열심히 사는 동안 정작 생각하는 일은 뒷전에 두고 있었다는 걸요.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급급하다 보면, 무서운 건 바쁘다는 게 아니라 생각할 틈이 슬그머니 사라진다는 거였어요. 나는 어떤 사람인지, 어떻게 살고 싶은지 같은 고민 대신 ‘오늘 뭐 해야 하지‘만 남았습니다. 할 일 목록은 날로 길어지는데, 정작 그 목록 어디에도 ‘나’라는 항목은 없었던 거죠.
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지는 대충 짐작이 갑니다. 어느 날 갑자기, 아주 뒤늦게 삶에 대한 고민이 한꺼번에 몰려오겠죠. 그때 가서 “그동안 뭐 했지?“라고 묻는 건 좀 억울할 것 같았습니다. 적어도 저는 지금 알아차렸으니까요.
그래서 요즘은 거창한 결심 대신 생각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. 조금 더 큰 고민도 하나 있는데, 사는 환경 자체를 바꿔보는 겁니다. 어디에 사느냐가 바뀌면 어떻게 사느냐도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요. 마음만 먹어서는 잘 바뀌지 않던 일상이, 환경의 힘을 빌리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요?
아직 답을 찾은 건 아닙니다. 다만 ‘살아지는 대로‘가 아니라 ‘살아가는 쪽’으로, 방향만큼은 조금 틀어보려는 중입니다. 오늘도 체크박스는 여전히 많겠지만, 이 할 일들을 통해 어떤 나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.
- 체크박스 사이에서 오늘도 생각 중인 지영 드림 -